다자주의의 위기와 한국의 진로
제143차 KOIMA CEO 아카데미
다자주의의 위기와 한국의 진로
유장희
이화여대 명예교수
매경미디어그룹 상임고문
KOIMA위원회 위원장
우리나라가 무역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무역질서가 제대로 정상궤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7년 GATT 출범 이후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무역의 질서가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공정하고, 좀 더 공평한 질서를 만들어 나갑시다’라고 전 세계가 노력하는 가운데 후진국의 제품도 사주자는 질서가 있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이와 같은 경제번영을 우리가 누리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좀 더 공정하고, 공평하고, 자유롭고, 걸림돌이 없는 무역의 질서를 만들어 나가자고 전 세계가 모여서 노력한 이념을 다자주의라고 부른다.
다자주의의 역사
2차 세계대전 이후 1947년, 전쟁 중 만연했던 보호무역주의의 탈피를 목적으로 23개의 주요 무역국이 모였다. 이 국가들은 Ricardo, Hecksher, Ohlin과 같은 유명 경제학자들이 제시한 세 가지의 무역 대원칙인 자유무역·공정무역·공평무역을 기반으로 한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와 무역의 일반 협정)를 채택했다.
이후 GATT 중심의 몇 차례 관세인하 협상을 거친 뒤, 1973년 도쿄에서 99개국이 참여한 제7차 관세 인하 협상(Tokyo Round)이 진행됐다. 이 협상에서는 무려 25만개의 양허 품목에 대한 평균 관세를 33% 인하하는 엄청난 결정을 내렸다. 1986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8차 협상(Uruguay Round)에는 개도국도 더해져 총 117개국이 참여했고, 26만개가 넘는 양허 품목에 평균 33%의 관세 인하를 하는 획기적인 결단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GATT에 포함되지 않았던 지적재산권·서비스·정부조달·자본거래·농산물 등 신규 분야에 대한 항목을 추가했다.
1995년, 우루과이 협상 종결과 함께 마라케시 선언으로 WTO 체제의 출범이 선포됐다. 신사협정에 불과해 제재장치가 없는 GATT와는 달리 WTO는 하나의 기구로 재판소 역할을 하는 DSB(Dispute Settlement Body, 분쟁해결기구)가 있다. 소속국가도 127개국으로 증가했다.
WTO가 출범한 95년 이후 세계 무역의 양은 급증했으며, 전 세계가 원활하고 자유로운 무역을 함으로써 경제 전반이 좋아졌다. 특히 개도국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는데, 이 시기에 한국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자주의와 한국무역
한국의 산업구조는 다자주의의 발전 속도에 맞춰 절묘하게 발달했다. 1960년대 GATT의 ‘개도국의 경공업 제품 구매 촉진’ 관련 규정에 맞게 경공업이 발달했다. 1970년대에는 개도국에서 수출되는 경공업 제품뿐만 아니라 중화학 제품도 많이 사주자는 규정이 추가되었는데, 그때 한국은 중화학공업 위주로 경제발전을 이뤘다. 1995년 WTO가 출범하며 지적재산권 등 새로운 규범이 추가되면서 한국은 ICT 제품 및 생명공학 제품 수출을 늘렸다. 이를 보면 다자주의의 혜택을 가장 맛있게 즐긴 나라가 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WTO의 동향
다자주의가 진행되는 동안 지역주의(Regionalism)가 난립했다. ‘WTO 이상의 다자주의를 달성하자’는 목표로 선진국 참여 하에 만들어진 지역별 소규모 FTA(Free Trade Agreement, 자유무역협정)가 여기저기 등장하게 된다. EU, NAFTA, AFTA 등을 소규모 다자주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역주의의 난립이 가능했던 이유는 GATT 24조, ‘관세 협정 또는 자유무역지대는 역내무역을 활성화함과 동시에 역외 국에 대해 무역장벽을 높이지 않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조항 때문이다.
한편 지역주의 현상을 두고 두 가지 이론이 제기됐다.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박사는 ‘좀 더 자유롭고 공평하게 노력한다면 미래에 소규모 다자주의는 합쳐져 WTO의 자유도가 발전할 것이므로 오히려 권장할 만한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상반되는 주장으로 자그디시 바그와티(Jagdish Bhagwati) 교수는 ‘WTO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공평인데, 만약 소규모 다자주의로 인해 소외 받는 WTO 소속국가가 생긴다면 그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분파현상이 WTO의 권능을 훼손시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또 우려되는 것은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이다. 비회원국에 대한 준 회원국 대우로, 지역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대표적인 예로 APEC을 들 수 있다. 이 개방적 지역주의로 인해 WTO의 회원국들은 WTO 자체에 충성을 하기 보다는 세력을 넓히기 위해 잘 되고 있는 지역 주위에 접근하고 있어 WTO의 권능 약화가 걱정된다.
마지막으로 WTO 자체의 능률이 저하되고 있다. 출범 당시 127개국이었던 회원국은 현재 164개국으로 확대되었다. WTO 회원국이 증가한 만큼 그들의 이해관계도 다양해 이를 조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대통령의 WTO에 대한 무관심도 능률 저하에 한몫 하고 있다. 중국, 인도 등 ‘개도 강국’의 발언권이 강화되면서 위기를 느낀 미국은 부시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WTO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있다. 또한 분쟁해결기구(DSB)의 권위도 실추되었다. 약소국을 상대로 한 제소에서 빈번히 패소해 체면을 잃은 미국은 분쟁해결기구를 무시하는 등의 행동으로 DSB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미·중 무역전쟁은 2018년 9월 23일, 미국이 중국물품 530억$ 수입에 관세 15% 부과를 발표하며 시작됐다. 이 발표에 대항해 중국은 같은 날 미국물품 500억$에 대해 관세 15% 부과를 선언했다. 이후에도 양국은 관세 부과와 반격을 주고받았으며, 양국의 무역전쟁은 금년 8월 5일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며 더욱 심해졌다.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기가 무섭게 중국은 ‘포치(破七)’, 즉 $당 7 위안선을 넘는 위안화 절하를 실시하며 긴장상황은 더욱 확대되었다.
미·중 무역전쟁에 불을 붙인 사건은 ‘화웨이 멍완저우 부회장 체포사건’이다. 화웨이 회장인 런정페이의 딸인 멍완저우 부회장은 캐나다에 현지 법인인 ‘SKYCAM’을 설립해 이란과 최신기술을 담은 무기거래를 했다. 이 최신기술 중에는 미국이 특허권을 가진 기술이 다수 포함돼있었고, 미국 정부는 이를 기술스파이 행동이라 판단, 캐나다 정부에 요청해 멍완저우 부회장을 체포했다. 중국 정부는 반격으로 두 명의 캐나다인을 억류했고, 이 사건으로 미국 여론은 반중으로 돌아섰다.
이 문제를 두고 세계의 여론과 WTO를 중심으로 한 주요 인사 및 전문가들은 문제의 발단이 중국이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이 꼽는 중국 외교의 최근 6대 실책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전 세계가 공유하는 스프래틀리 군도(난사 군도)에 군사시설을 구축해 세계질서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국을 위협하고 있다. 두 번째, 2015년 중국이 발표한 ‘중국제조 2025’, 제조 경쟁력에 있어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발표는 현 제조업 경쟁력 1위를 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대미 선전포고’로 해석될 수 있다. 세 번째, 2016년 한국에 사드를 배치했을 때 한국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 너무 심했다. 미국의 ‘사드는 중국용이 아닌 북한 방어용’이라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보복은 멈추지 않았다. 네 번째, 2018년 시진핑은 전인대에서 연임제한을 철폐했다. 이것은 덩샤오핑의 권불승소, 소수 사람에게 권력을 승계시키지 말라는 원칙을 위배하는 행위이다. 다섯 번째, 미북정상회담을 계획하던 중 6년 단교상태였던 김정은과 2월, 3월, 6월 연거푸 만남을 가졌다. 여섯 번째, 경고 목적인 미국의 중국물품 500억$에 대한 25% 관세에 대항하면서 세계의 무역뿐만 아니라 정치, 안보 등 모든 측면에서 긴장감이 최고로 고조되었다. 이에 더해 중국은 미국 정부에 등록된 지적재산권을 위반했음에도 그에 대한 개선책이 없다.
한·일 무역전쟁
한·일간에는 1948년 이래 강제징용 문제, 위안부 문제 등 분쟁사항이 꾸준히 존재했지만,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실용적 노선을 견지해왔다. 경제협력을 넘어 안보 분야의 이해 공유를 위해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도 채택했었고, 한·미·일 공동 안보체계도 형성했다.
하지만 2015년 위안부 위로금 합의문에 대한 한국정부의 거부, 2019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금 지급 판결 및 ‘한국이 전략물자를 밀반출했다’는 주장을 이유로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일본 의존도가 높았던 반도체 필수품목의 수출규제를 단행했으며 백색국가에서도 제외시켰다.
이에 한국 정부는 WTO, 대미외교 등에서 우리 입장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필수 기초재료의 수입선 다변화 및 R&D 강화를 통한 국내 조달 등 일본발 수출규제에 대응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향후 다자주의의 전망
WTO의 골격은 유지되겠지만, 운영방식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 운영방식인 다자간 협상방식(Multilateralism)이 아닌 복수간 협상방식(Plurilaterlism)으로 바뀔 것이다. ‘부속서 형태로 WTO의 규정을 만들어 뜻이 맞는 국가끼리라도 서로 그룹을 형성해 앞서나가자’는 취지인 복수간 협상방식으로 운영하면 이해 공유되는 국가끼리 관계를 갖는 방식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WTO의 적용이 이분화 되어 1995 규범을 전반적으로 적용하고, 일부 신규 규정(부속서 형태)에서 중국, 인도 등 비협조국을 배제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입장
한국은 현재 WTO가 약화되면서 나타나고 있는 반다자주의, 신보호주의, 폐쇄적 지역주의 현상에 슬기롭게 대처해나가야 한다.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대 경제학자인 A. Smith, D. Ricardo, F.Hayek, M. Friedman, P. Samuelson은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국가군들은 장기적으로 항상 승리자가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도 WTO가 약화되면서 염려와 고통이 따르고 있지만 자유롭고 공정한 균형 있는 무역, 보편적 가치를 향해 앞장서는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또한 뜻 맞는 국가들끼리 맺어가는 관계, 복수주의체제(Plurilaterlism)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것을 이끌어가는 Leading 국가가 되면 더 좋을 것이다. 당장은 좀 힘들겠지만 WTO의 숭고한 가치를 지키며 때에 따라서는 복수주의체제로, 뜻에 맞는 국가들을 모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살 길이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Brexit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Korenter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EU를 exit하려는 영국과는 다르게 한국은 enter한다’라는 뜻이다. Korenter의 개념에 따라 TPP, RCEP, AIIB, FTAAP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Digital Revolution에 앞장서는 나라이다. 이를 더욱 발전시켜 Digital Revolution에 있어 개방적 선두주자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인의 자세
한국 기업은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반도체·철강·조선·자동차·석유화학·가전제품은 전 세계에서 5위 내에 속해있고, 건설·토목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선두분야이다. 혁신에 앞장서는 기업문화도 보유하고 있다. GDP에서 R&D가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1위, 특허출원 세계 4위, 저작권 및 특허권 세계 5위, 블룸버그 혁신지수는 세계 1위이다.
기업뿐 아니라 한국인도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한국인의 속성과 한국기업인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논문도 많이 있다. ‘기마민족설’도 있고 ‘남방이민설’도 있는데, 결국 다이다믹 하다는 것이다. 또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과 인류공영·인권존중·박애사상·인의예지와 같은 가치를 마음속에 품고 사는 민족이기 때문에 여러 종교들이 함께 번영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나’보다 ‘우리’가 중요하다. 이것을 ‘우리성(us-ism)’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우리만이 갖고 있는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독특한 문화와 예술성도 장점이 된다. 한글, 금속활자, 거북선 등은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문화재산이다. 방탄소년단과 같은 아이돌, 한국여성의 세계 골프 제패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
한국경제는 1970년대에 찾아온 강력한 다자주의에 힘입어 수출이 급증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최근 위협받고 있는 다자주의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변형일 뿐 근본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중 무역전쟁, 한·일 무역전쟁 와중에서도 원칙을 지키며 한국의 이미지를 ‘개방형 성장’을 추구하는 자유무역의 선도국가로, 앞서가기도 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아가는 국가로 형성해 나아가는 정책적 노력이 요구된다. KOIMA 회원사들도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다자주의에 적극 동참하고 이를 선도할 수 있는 결의를 다짐해주시길 바란다.
